베트남이라는 나라/베트남 개요

베트남 독립 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46년 - 1954년)

하노이 나그네 2023. 9. 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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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여 철수했으나 베트남 지역은 무정부 상태였고, 프랑스인들은 아직 억류됐다.

며칠 후에 호치민의 베트민은 중북부 지방 대다수를 장악해 9월 2일 재통일과 독립을 선언하며 투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민족주의로 철저히 무장돼 있어 독립을 열망하는 주민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다.

한편 북위 16도 북부는 중화민국군이, 남부는 영국군이 각각 진주했으며, 북부를 지배했던 중화민국군은 국공내전 탓에 거기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으며 1946년 4월에 장제스 총통은 중국 내 프랑스 조계 및 할양지 반환, 쿤밍-하구철도 판매, 하이퐁 1개 특구 양보, 인도네시아 주재 화교의 지위 회복 등을 전제로 프랑스 정부와 중-불 협상을 맺어 프랑스에 양도토록 합의했다.

반면 남부 측은 영국군은 스핏파이어를 비롯한 영국제 무기를 넘겨주고, 별다른 마찰없이 프랑스인들을 석방시켜 프랑스에 남부 지배권을 맡기게 됐는데, 미국은 베트남의 즉시독립을 주장하였으나 프랑스 제4공화국 프랑스 식민제국의 유지를 원했다.

미국은 악화일로로 치닫는 소련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한 나라라도 우방국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프랑스의 입장을 지지하게 된다.

프랑스는 처음에는 1946년 3월, 베트민과의 하노이 예비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자유국가로 인정했다. 

이것은 프랑스 연방 내의 자치령으로 남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신 프랑스군1952년까지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것을 골자로 협상이 맺어졌으나, 사실 이는 프랑스의 눈속임으로, 프랑스는 베트남에 공산주의자들이 통치하는 것을 묵인할 생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호찌민 역시 이 협상을 두고 같은 공산당 내부에서 매국노(…)라고 욕을 들어먹고 있던 상황이었고, 결국 양국간에 전면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1946년 11월 20 베트민과 프랑스군 사이 세관업무를 가지고 충돌이 있자, 프랑스가 함포로 쏴제껴 베트민군을 공격하고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하는 하이퐁 사건이 터지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다.

1946년 12월 19일부터 프랑스군은 통킹 삼각주 일대의 각 요새와 하노이의 호치민 관저 및 기타 요충지를 습격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1947년 2월에 중부의 다낭, 후에 지역에 상륙했다.

프랑스가 코친차이나 지역에 세운 코친차이나 자치공화국 임시정부 기. 베트남말로는 꽁호아 뜨찌 남끼(Cộng hòa tự trị Nam Kỳ, 남기 자치공화국, 共和自治南圻)이라고 한다.

후에 의회와 프랑스의 동의로 남베트남(베트남국 - 왕정)에 자치를 전제로 흡수된다.

프랑스 시민권자였던 응우옌반틴(Nguyễn Văn Thinh, 阮文廳, 완문청)이 총리으나, 1946년 11월 10일, 응우옌반틴이 사망하였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이 깃발은 1948년 6월 2일까지 썼다.

뒤는 1949년 바오다이 황제(1913~1997, 재위 1925~1955)가 이었다.

바오다이는 즉위 직후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1932년까지 머물렀으며, 보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즉위 초에는 내정개혁과 자치독립에 힘썼으나, (당연히) 프랑스의 방해로 갈수록 성과 없는 이런 노력에 지쳐 이후엔 사냥 자동차 등 향락에 빠지게 된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독립으로 호치민에 의해서 고문으로 밀려났지만, 1946년 홍콩으로 망명했다가 3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

한편 같은 시기 남베트남은 온건한 독립을 준비 중이었다.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은 응우옌 왕조의 황제를 명분으로 친프랑스 정부를 세우려 한 것이다.

1946년 성립된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자치공화국을 이어받아, 1948년 베트남의 여러 세력과 프랑스가 절충을 한 결과, 같은 해 5월 27일에 잠정 정부로서 베트남 임시 중앙 정부를 설립했다.

그 후, 1949년 3월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는 프랑스-베트남 협정을 체결하여, 같은 해 6월 14일에 정식으로 '베트남국'이 성립됐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러한 전쟁지속 정책은 소련 중국의 지원을 받는 베트민군의 대반격과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오는 재정적인 문제에 국제여론마저 악화되면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54년 인도차이나 문제로 제네바에서 회의가 개최되었고,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Điện Biên Phủ, 奠邊府)에서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군에게 병력 대부분을 상실하고 대패하면서 베트남을 포기하고 철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 바로 제네바 협정이다.

프랑스와의 제네바 협정(1954년 4월 26일 ~ 7월 20일)의 결과 그해 8월 1일부로 전쟁은 끝났고, 10월에 프랑스 군이 철군하면서 한시적으로나마 정전선 설정에 관해서 논란이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프랑스는 18도선을 고집했고, 베트민은 13~14도선을 주장했다.

저우언라이가 16도선을, 몰로토프가 16~18도선 중간인 17도선을 중재하여 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군사경계선으로 하여 월남에는 남북으로 2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1955년 10월 26 남베트남에 국민투표로 왕정이 축출되고 응오딘지엠 정부가 수립되었다.

 베트남 공화국의 건국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달 1월을 기점으로 내전은 다시 시작되었다.

호치민 대통령은 17도선을 휴전선이라고 보며 남베트남이 1956년 남북통합 총선거를 받아들여 줄 것을 간절히 원했다.